작성자: 제삐(boba0505)
뭐 진눈머 분들은 이미 짱개들의 간악함을 알테니 긴 설명은 필요 없겠습니다만, 까치와 까마귀에 대해 한번정도는 정리가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몇가지를 첨부하고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까 치와 까마귀의 관계를 쉽게 말하자면 흔히 드라마에서 가짜자식이 진짜 자식행세하며 친자식이 부모못찾게 훼방놓는경우가 있더군요. 막장 드라마 왜봅니까.드라마보다 더비극적으로 뒤바뀐 운명. 까마귀와 까치가 여기 있으니 말이죠. 비록 사람이 아니라 조류가 주연이지만 말입니다. 후후.웃자고 말했지만 사실 까마귀는 개중국 특유의 이미지 바꿔치기와 한반도 정신 몰살시키기의 희생양이며 까치는 과대포장된 새입니다. 두새의 운명이 한반도에서 비극적으로 뒤바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것이죠.
그 주된 배경엔 역시나 호구의 역사 "화교왕조 조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보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까치는 길조로 치죠.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할정도로 말이죠. 그러나 까치는 세계적으로 길조보다는 해로운 새에 가깝습니다. 거의 우리나라와 중국만이 독보적으로 까치를 길조로 여기고 있는 형국입니다. 까치새끼들 하는짓에 비해 상당히 잘 포장된게 개중국 종특이 보이지요.
이렇듯 곡식을 아작내고 포악하며 집단으로 한마리를 괴롭히는 못된습성이 있는 까치는 중국에서는
환영을 받는새 중 하나 입니다.
중국인이 까치를 좋아하는 이유 출처(연변모이자 yanbian.moyiza.com) : 자료실 - 중국인이 까치를 좋아하는 이유 - http://yanbian.moyiza.com/t03_6/200681 (흑룡강신문=하얼빈)까치는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에게 길상조로 불렸다. 농촌에서 결혼식을 할 때 잔치집에서는 까치를 빨간색 종이로 오려 창문에 붙여놓는 풍속이 있다. 이는 까치가 길함을 가져올 뿐만이 아니라 남녀사이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주기 때문이다. 몸체가 작고 가벼우며 목소리가 챙챙할뿐만 아니라 고생을 마다 않고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위해 다리를 놓아주는 까치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 매번 까치의 울음소리를 들을때면 사람들은 희사가 생기지 않으면 반가운 손님이 올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중국문화에서 까치는 수없이 출현한다. 길상과 행복의 상징으로서 까치는 역대로 많은 문인들에 의해 예쁘게 묘사됐으며 길상도안으로 새겨져 서화, 가구, 기물 중에서 경사의 뜻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까치는 왜 이토록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을까? 고대 유가학파들의 잡문에는 까치가 자주 등장한다. 이들의 문장에서 까치의 지위는 아주 고귀하며 '성현조(圣贤鸟)'로 받들고 있다. 그 이유라면 아주 간단하다. 고대사람들이 보기에 까치는 일년내내 똑같은 소리를 낸다. 기쁘든 슬프든, 땅에서든 나뭇가지 위에서든, 죽을 때든 갓 태어날 때든 까치가 내는 소리는 시종일관 똑같은 음에 똑같은 소리이다. 유가학파의 문인들이 볼 때 까치의 이런 시종일관적으로 안정적이고 명확하고 요지부동한 정신상태는 그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여겼으며 옛날 성현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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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acingsnail.blog.me/80157190697
까치는 기쁨을 상징하는데, 언제부터 까치가 기쁨을 상징했지요?
옛 그림 속에 참새가 나와도 기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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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까치는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나라의 국조입니다.
뭔 나라새 뽑기 운동을 벌였다는데 상당히 냄새나는 운동이 아닐수 없지여.
두산백과
국조 [ national bird , 國鳥 ]
한국에서는 한국일보사 과학부에서1964년 10월부터 12월까지 2개월 간에 걸쳐 국제조류보호회의(ICBP) 한국 본부와 관계 학계의 후원을 얻어 ‘나라새 뽑기’ 운동을 벌였는데 그 결과 전국적인 공개응모에서 총 2만 2780표 중 9373표로 다수표를 차지한 까치가 뽑혔다. 이러한 결정은 ICBP 본부(영국)에도 보고되었다.
까치는 예로부터 한국의 민화와 민속에 자주 등장하는 친밀한 새로서, 특히 아침에 우는 까치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준다 하여 길조로 여겨져 왔다. 국제조류보호회의는 애조(愛鳥)사상을 고취하는 의미에서 그 밖의 나라에서도 국조를 정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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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예전에 한번 이야기 나왔던 "동방예의지국"이 중국맞춤형 이었다는 불편한 진실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하는짓에 비해 과한 대접을 받은 까치가 있는 반면,
우리의 까마귀는 언젠가부터 흉조로 취급 받기 시작합니다.
거슬러가면 까마귀는 우리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새 입니다. 아시다시피 고구려의 삼족오가 까마귀죠.
단순히 새의 좋고 나쁨.취향 문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은 민족 정기와 관계된 중요한 일이니 간과해서는 안될일이라 생각됩니다. 까마귀에 대해 오늘날 한국인이 가지게된 흉조의 이미지로의 변질은 결국 한국민도 모르는사이에 행해져 왔습니다.
그것은 중국측에 의해 행해진 "고구려정신 말살 정책"입니다. 또한 이것이 앞서 깨달아왔던 짱깨의 치밀하고 수많은 만행 중 한가지 일테구요.
고구려 삼족오는 세발의 까마귀입니다. 그러니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이고 고구려 정신을 계승하려면 당연히 까마귀를 길조로 여겨야 하며 국조로 지정해야 마땅한 일일 겁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우리역사라 하면서도 왜 까마귀는 흉조가 되는지 다른사람들은 몰라도 여기 분들은 잘 아실겁니다.
그 까마귀에 대한 미움은 거슬러가면 중국이 고구려에게 수많은 치욕과 농락 을 당한 역사에 기원합니다. 까마귀가 중국에서 흉조가 된것은 어찌보면 필연인데 이는 짱깨들이 지어냈다기 보다는 긴세월동안 자신들이 겪은 역사 탓입니다. 고구려의 상징은 알다시피 삼족오입니다. 이 삼족오는 고구려의 군기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지요.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다보면 중국이 수많은 전투에서 고구려에 대패를 하고 대부분이 몰살당하여 살아나간 사람이 거의 없다는것을 아실겁니다. 처음에는 그저 고구려 군기에 그려진 삼족오를 보고 고구려군이 몰려온다라고 생각했겠지만 고구려군에게 몰살당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짱개입장에선 고구려의 삼족오가 보인다 = 황천길 가는날 인것이죠. 결국 그들에게 삼족오란 존재가 보이면 "살아 돌아갈수 없구나"를 의미하게 된것이고요.
사정이 그렇다보니 고구려군에 대한 공포가 엄청 날수밖에 없지요. 결국 까마귀깃발인 삼족오가 보이면 재수가 없다거나 이제 죽을때가 되었다고 하는것이 짱깨들 사이에는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게 되었고 짱개들 태생적으로 세포에 각인이 되었을꺼라 봅니다.그도 그럴것이 짱깨들에겐 까마귀(삼족오)존재가 끔찍한 죽음의 시작 으로 보였을테니까요.
그런데 조선시대는 화교 왕조 입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여겼음은 불보듯 뻔한 일이겠지요.
주자가 까마귀를 불길하게 기록한후
(주자는 송(宋 960)나라 사람으로 이웃한 북방민족(금.원나라)이 그의 조국을 지속적으로 침략해 왔다. 시경 패풍의 북풍에 나오는 까마귀를 불길한 새 흉조로 주석을 달아 놓은것 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화사상에 쩌들은 개념없는 사대부가 중국을 흠모하고 오방색에서 북쪽의 검은색과 대비를 이루던 붉은색을 숭배하는 사상으로 이르러(붉은 색은 중국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죠) 까마귀는 더더욱 흉조로 여겨졌지만 조선후기때만해도 서민들이 세우던 솟대에는 까마귀가 남아있었습니다.(한마디로 배운놈들이 개념이 없었음)
여기분들은 알겠지만 조선시대는 백성(고려)와 왕조(화교) 로 이뤄진 국가라 왕조에서는 까마귀를 불길하게 여기지만 아마도 서민들의 솟대에는 까마귀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것이겠지요.
그러한 역사적 민족적 배경으로 중국은 우리에게 남은 고구려흔적을 지우려 까마귀를 흉조로 삼기시작했지요. 민족 정신을 훼손하고 고구려 계승의지를 차단하기 위해서 말이죠. 결국 까마귀가 흉조이미지가 된것은 철저하게 중국의 세계관이 투영된 왜곡된결과 입니다.그렇게 지금에 이르러 한국에 까마귀가 흉조의 이미지를 덧입게 된것입니다.
중국에서 까마귀 이미지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중국에서의 까마귀 이미지.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天下乌鸦一般黒)-- 나쁜 습관이나 일이 같을때. 까마귀 입(乌鸦嘴)— 말이 많거나 연속 떠벌리는 사람 까마귀 울음소리(乌鸦叫声)- 노래 못하는 사람 풍자 까마귀 울어댄다 (乌鸦乱叫)공공장소에서 잘난것처럼 떠벌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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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것이 중국에서의 까마귀 이지요.
그러던 중국이 최근에 들어서는 또 하나의 정신승리 전략을 펼치고 있어요.
그 것은 바로 까마귀가 중국의 길조 였다는 주장이지요. 까마귀를 음해해 한국민들로부터 까마귀를 떼어 놓는데는 성공했지만 청나라의의 국조가 까마귀 였기 때문에 까마귀싫어하는 전통적인 기질과 역사까지 뒤없고 조작을 하려하네요. 청나라를 본인들의 역사로 편입하려 짱개들은 까마귀가 중국인들의 길조였다는 날조를 하는거지요. 그들이 이미 역사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싫어 할수밖에 없는 까마귀를 본인들의 길조 였다고 우겨서라도 청나라의 역사와 나아가 고구려의 역사까지 넘보려는 얄팍한 눈가림입니다.
▼ 중국에선 까마귀가 흉조아니냐는 질문에 청나라를 중국의 역사인냥 근거로 대답하는 짱개 우마오당
이것은 중국의 동북공정- "청사공정" 때문이라고 봅니다.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1716
中 새 역사공작 ‘청사공정’ 핵심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모두 중국 역사”
"청사공정"을 간단히 말하면 100만인구를 가진 만주족이 1억이 넘는 한족을 지배했고
중국은 이러한 청나라를 중국의 정통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까지의 중국 역사학계는 이민족이 한족을 지배한 것에 불만을 품어, 청나라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보였었다. 그러나 다이이는 청나라가 확장해준 영토 덕분에 지금 중국이 있게 되었고 수많은 이민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니 청을 중국의 정통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다이이의 역사관 위에서 동북공정 등이 꽃 피었다. 중국은 다이이 덕분에 중국 안에 있는 55개 소수민족의 역사는 다 중국의 역사라는 인식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니 중국의 흉조인 까마귀가 갑자기 길조로 날조되기 시작한건 당연한 일이됩니다.
이렇게보면 짱깨 새끼들은 참으로 입장에따라 어제한말도 획획 바꾸는게 철면피는 기질적으로 타고난듯싶네요.
청나라의 국조(國鳥)는 왜 까마귀일까?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695
고구려-삼족오와 청나라의 국조 까마귀.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요? 만주족의 까마귀를 길조로 여기는 습성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것이고요. 고구려를 역사로하며 청과 만주족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에서 그 까마귀를 몰라봐서야 되겠나요.
그런데 잼있는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고구려가 우리 역사다보니 왜 우리가 까마귀를 흉조로 여기게 되었지? 하는 의문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 이유를 여기카페에서는 다 알겠지만 일반의 한국인들은 모르게 되는거지요.
그틈에 짱깨의 이간질 정책이 판을 치게 되는데 자기들의 짓을 무조건 일제의 만행으로 돌리는 짱깨 종특이 또 나타나는것이죠.
까마귀를 흉조로 만든게 일본이라는 거지요.
▼ 잘못된 인식과 우마오당들.
뭐든지 일본 탓이죠.일본이 아니면 이야기가 안될 지경입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일본에선 길조인 새입니다. 국조로 오해받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까마귀를 좋아합니다.일본 여행 갔을때 길거리에 까마귀가 정말 많더군요.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던 까마귀가 인상깊게 남아있습니다.
또한 재미있는것은 일본과 고구려는 연관이 깊다는거지요.
일본으로 옮긴 고구려 왕조
http://blog.daum.net/lowsalt/7165811
고구려와 일본의 연관성
http://cafe.naver.com/godemn/5931
아베 가문은 한국계
http://cafe.naver.com/godemn/5881
중국은 까마귀에 분명히 어떤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이건 수많은 역사적 증거들을 떠나 부정을 하려고 해도 그들 세포하나하나에 녹아 들어있는 고구려에대한 두려움은 지울수 없는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보니 이것들이 실성을 한것인지 자신들의 까치-사랑 과 까마귀-두려움의 감정을 짱개특유의 정신승리를 거쳐 망상으로 까지 만들어 퍼트리고 있더군요.
끝으로 조선족 소식지 <흑룡강신문>서 내보인 저급한 정신승리 조선설화를 보면서 마무리 할까합니다.
광해군에 대한 중국의 폄하도 더불어 보실수 있을 겁니다. 조선족 말투가 역겹더라도 한번쯤 읽어 보시길 권해봅니다.
http://hljxinwen.dbw.cn/system/2008/11/26/000090744_10.shtml
까치에 대한 짱깨의 정신승리 망상
까치가 울면 기쁜 일이 나진다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은 아직 세자로 있을 때는 그처럼 지혜가 뛰어나고 덕이 높고 재질도 총명 과인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건만, 일단 왕위에 오르자 차츰 사람이 심성부터 협소해지고 성정마저 잔인한 우에 고약한 시하들의 무도한 말까지 무작정 받아들어 날이 갈수록 나라 일을 크게 망치였다. 그는 매사에 의심이 많아 자기의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 덕수궁 속에 가두어 버리고 그 어머니 몸에서 낳은 여덟 살 어린 동생 영창 대군을 참혹하게 죽이는가 하면 계모의 오빠인 김계남을 십자로에다 참형을 하며 인목대비의 어머니, 즉 광해임금의 할머니 되는 고령의 부씨부부인마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는 등으로 임금으로서는, 아니 사람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끔찍한 짓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다. 광해군의 박해로 하여 그때 부씨부인은 옹군 10년 동안 머나먼 이역 제주도 섬 속에 쫓겨가서 눈물을 잔주리고 원성을 감키면서 산전수전 갖인 고생 다 겪는 정배살이를 지내가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 처참한 정상이야말로 돌로 깎아 만든 사람이라도 돌아다 볼 것이요 쇠로 부어 만든 사람이라도 락루할 것이였다.이렇게 한 번 귀양온 몸, 세월은 아물아물 흘러 어언 10년 세월! 서울 소식 한 번 들어도 못 보고 그저 그날 그날 근근히 살다가 억울한 섬 귀신으로 몰망하고 말 것은 뻔했다.
이런 어느 하루 아침이였다. 그날따라 난데없는 까치 한 마리가 부씨부인이 있다는 집 처마 앞에 와서 깍깍깍하고 세 번을 울었다. 까치란 본시 온화한 대륙에서만 살 뿐 제주도같이 무덥고 비 잦은 지방에서는 좀체로 볼 수 없었던 새인지라 부씨부인은 아주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곳에 없던 까치가 오늘다라 내 집 처마 끝에 와 울다니? 혹여 내가 인젠 눈이 어두워 잘못 본 게나 아닐까?》 다시 눈을 비비고 보고 또 보아야 틀림없이 서울서 보던 그런 까치였다. 이 때, 이웃 사람들도 까치를 보더니 이 참 이상스런 일이라고 와짝 떠들어댔다. 허 나 부씨부인은 부씨부인대로 《폭군으로 하여 서슬 푸르고 무고했던 집안이 졸지에 다 망하고 일가 모두 처참히 횡사를 당했는데 이제 또 무슨 더 무서운 소식이 있을라고 까치가 와서 우노? 소식이 있다면 인젠 아마도 나마저 잡아가려고 그러는 거겠지!》하고 눈물을 흘리며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었다. 이러구러 조금 있는데 인목대비의 휘음을 가진 승지가 들이닥쳤다. 그는 부부인 앞에 납작 꿇어엎드려 절하고 나서 말했다. 《부부인님, 그 사납던 광해 임금은 천의와 민의에 못 이겨 쫓겨나고 새로히 인조 임금께서 드시였나이다. 이에 인목대비께서도 자유로운 몸이 되시어 인제부터 나라일을 보살피게 되었사와 부부인님을 모시고 오라는 전갈이오니 어서 바삐 상경길에 오르사이다.》 이야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였다. 승지의 말을 다 듣고난 부부인은 오직 꿈만 같아 눈물만 좍좍 흐릴 뿐이였다. 이윽고, 급급히 서둘러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부부인일행이 조천 관두부에 나오니 린근 섬사람들도 어느새 이 기별을 알고 너도 나도 달려나와 펄펄 뛰기도 하고 감격하여 울기도 하면서 부부인 만만세까지 불러댔다. 배 떠나는 포구는 온통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공기로 꽉 찼다. 이윽고, 배가 포구를 떠나 바다 한 가운데로 향하는데 난데없는 까치 한 마리가 섬에서 포르릉 날아오더니 일행이 탄 배의 돛대우에 살짝 내려앉아 깨깨깨하고 울어댔다. 그제야 부부인이, 《야, 까치야말로 희소식 전하려 천리원로 마다하지 않고 예까지 왔었구나!》 하며 솟구치는 감격을 금치 못해 하였다. 이에, 모두 도대체 이 까치가 어디서 왔댔나 하고 물었더니 배사공 하는 말이 자기가 해남에서 승지를 태워가지고 제주도로 행할 적에 벌써 까치 한 마리가 제 먼저 앞서기하여 돛대에 앉더니 배가 제주도에 거의 닿자 제주도 쪽으로 푸릉푸릉 날아 들어가더라는 것이였다. 그 말에 온 배의 사람들은 한입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까치란 참말 기쁜 소식을 전하는 희조요 령물이로구만!》 이로부터, 향간에서는 까치란 말만 나오면 희소식 전하는 반가운 새라고 일컬으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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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에 대한 짱깨의 정신승리 망상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 이 속담은 조선 제주도에서 전하여져 내려온 것이다. 하루는 저승의 염라대왕이 까마귀 한 마리를 불러서 분부했다. 《넌 이 글쪽지를 인간의 만사를 지배하는 강도령에게 전달해주라.》 까마귀는 이 글쪽지를 물로 떠났다. 까마귀는 날아가다가 죽은 말 한 필을 보았다. 그냥 지나가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아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다가 끝내 밭에 내려와서 말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하였다. 이때 갑자가 돌개바람이 일어서 그 글쪽지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까마귀가 배부르게 말고기를 먹고나서 글쪽지를 찾으니 온데간데 없었다. 그리하여 까마귀는 염라대왕의 징벌을 받을까봐 강도령한테 가서, 《대왕께서 아무놈이나 지옥에 끌어드리라.》 고 하였다고 전달하였다. 그 후부터 강도령은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닥치는대로 잡아서 지옥에 보냈다.이 때문에 저승에 가는 길은 혼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탓으로 그 뒤에는 까마귀가 울면 흉조로 보는 습속이 생겨게 되었어고 또 무엇을 잘 잊어버리는 경우에는 그때를 두고 《까맣게 잊어버린다》라고 하는 습속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설화 내용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라는 속담을 만들어 잘 잊어버리는 사람은 핀잔주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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